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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고 지워짐의 여정 - 크리스토프 바타유의 소설 <다다를 수 없는 나라>를 읽고

anbi1004 2019. 7. 6.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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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독을 위한 방법으로 필사를 결정했다. 부담 없는 분량과 독서의 즐거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 거기에 탐나는 문장들로 무장된 작품이라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그렇게 선택된 책이 프랑스 작가 크리스토프 바타유 소설 <다다를 수 없는 나라>. 담백한 문체와 군더더기 없는 문장들이 인상적이었다. 짧고 간결하지만 의미를 담기에 충분했다.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으면서 절제되었으나 자유로운 문장들에 감탄했다.

   소설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 주인공을 누구라고 명명하기 어려웠다. 작품 서두에서 사건 중심에 있던 인물들은 얼마가지 않아 모두 죽음을 맞이한다. 등장과 퇴장이 반복된다. 이유만 다를 뿐 한결같이 그 끝은 죽음이다. 수많은 죽음이 반복되지만 이야기의 맥이 끊어짐 없이 매끄럽다. 우리네 인생이 삶과 죽음의 교차점 속에 살아가듯 소설은 죽음과 죽음 속에 인생을 살아냈다. 억지스러운 반전이 있는 것도 아니다. 예측대로 흘러가지도 않는다. 이런 일반적이지 않음이 좋았다.

   농민의 봉기를 피해 시암으로 망명한 섭정공 우옌 안은 도움을 얻고자 일곱 살인 황제 칸을 프랑스에 보낸다. 프랑스 루이 16세는 자기 나라 일로도 충분히 머리가 복잡하다. 구지 바다 건너 먼 나라 일에 나서고 싶지 않다. 구하고자 했던 도움을 얻지 못한 칸은 폐렴으로 먼 타국 프랑스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어린 황제의 죽음은 연민을 일으킨다. 연민이 사람을 움직인다. 피에르 피뇨 드 브레엔 주교가 나서면서 부유한 후원자들의 도움이 모여 베트남에 보내질 선교단이 꾸려진다. 이미 병으로 죽음을 앞둔 피에르 피뇨 드 브레엔을 대신하여 뜻있는 신부와 수녀들이 항해에 나선다.

   포르투갈, 모로코, 탕헤르, 아프리카 해안, 희망봉, 마다가스카르, 인도, 세일론을 거쳐 1년여 만에 베트남에 도착한다. 13개월 여정 속에 선원들은 괴혈병으로, 콜레라로 죽어간다. 신비의 나라에 대한 환상은 참혹한 죽음 앞에 무너진다. 슬픔에 길들여지고 낯선 나라에 적응하며 선교사들은 남쪽 바딘에 정착을 꿈꾼다. 하지만 일부 성직자들은 생각이 달랐다. 당초 목적대로 베트남 복음화를 위해 북쪽으로 간다. 남겨진 사람들은 왕권을 되찾은 우옌 안의 복수에 의해 잔혹하게 학살당한다. 북으로 가던 미셸 수사는 습지열병으로 죽음을 맞는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했던 여정은 시간이 지나고 그 여정이 깊어질수록 하나, 둘 죽음으로 정리되어 간다.

지워지고 새로운 삶이 이어지고, 다시 지워지기를 반복한다. 마지막 남겨진 두 남녀, 즉 도미니크와 카트린 역시 죽음으로 지워진다. 그 죽음이 특별해 보이는 것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행복한 남녀와 그 순수에 압도되는 군인들의 뒷모습 때문이다.

   ‘다다를 수 없는 나라가 무엇일까? 선교단 목적지인 베트남이라는 게 처음 생각이었다. 하지만 책장을 넘기며 어쩌면 사람마다 저마다의 다다를 수 없는 나라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어린 황제 에게는 과거의 영화를 잃은 베트남이, 선교단의 신부와 수녀들은 오랜 노력에도 온전히 개종되지 않는 베트남 사람들이, 마지막에 남겨진 도미니크카트린에게는 그들을 잊은 프랑스가 다다를 수 없는 나라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나 또한 나만의 다다를 수 없는 나라를 품고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소설은 격동의 역사 속 그 중심에 서 있지만 요란하지도 시끄럽지도 않다. 그 담담함에서 깊은 여운을 느낀다. 소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지만 어느 것 하나 소홀하지 않다. 작가가 가지고 있는 그 통제의 힘을 선망하게 된다.

   격변하는 프랑스와 베트남 사이에서 그 어느 곳에도 다다를 수 없었던 사람들이 죽음으로 지워지고, 작아지고, 가벼워지며, 소설은 마지막을 준비한다. 남겨진 이들은 그들을 잊은 국가를 지우고, 삶을 지배했던 종교를 지우며, 모든 것을 벗어버린다. 그렇게 지워지고, 지우며,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아닌, 순수로 돌아가서야 비로소 행복을 만난다. 삶이란 너무 무겁다. 버리고, 지우며,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아닐 때, 행복을 만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