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작가가 직접 선택했다는 표지 그림에는 같은 자리에 줄지어 서있지만, 생김새는 각각 다른 네 그루의 나무들이 보인다. 표현주의 화가 에곤 실레의 『네 그루의 나무들』이다. 황금빛 하늘, 앙상한 가지, 갈색 잎들에게서 늦가을 석양이 질 무렵이 연상된다. 배경처럼 뒷자리를 차지한 산과 하늘의 들쭉날쭉 불안한 선이나 어둡고 쓸쓸한 색조에서 우울함과 고통이 느껴지기도 한다. 특히, 왼쪽 두 번째 나무는 이파리가 완전히 떨어져 앙상하다. 갈빛으로 물든 이파리 나마 아직은 풍성하게 남아있는 다른 세 그루의 나무와 대조적이다. 같은 하늘 아래 있다하여 그 삶이 같을 수 없음을 표현한 듯도 하다.
작품을 읽으며 작가의 선택이 옳았음을 인정했다. 표지 속 각각의 나무에게서 작품 속 네 명의 인물들이 연상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를 보며 주인공 영혜가 떠올랐다. 에곤 실레가 그림을 통해 인간의 실존을 둘러싼 고통스러운 투쟁을 표현했다면 한강은 글을 통해 이를 담아냈다 하겠다.
소설 <채식주의자>는 삶을 가져보지 못한 인물들의 절망을 그린다. 그 과정이 충격적이고 처참해서 마음이 불편하다. 푸른 잎이 떠오르는 ‘채식’이라는 단어와 어울리지 않는 쓸쓸한 표지 그림에서 짐작되었을지 모르는 불편함이다.
각기 다른 화자에 의해 전개되는 세 편의 이야기는 하나의 얼개로 묶여있다. 그 첫 문을 여는 것은 영혜의 남편이다.
“아내가 채식을 시작하기 전까지 나는 그녀가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 본문(p.9) 중”는 첫 소절과 “크지도 작지도 않은 키, 길지도 짧지도 않은 단발머리, 각질이 일어난 노르스름한 피부, 외꺼풀 눈에 약간 튀어나온 광대뼈, 개성 있어 보이는 것을 두려워하는 듯한 무채색의 옷차림, 가장 단순한 디자인의 검은 구두 - 본문(p.9) 중”로 영혜를 묘사하는 남편에게서 온기 없는 부부가 떠오른 것은 잘못된 예감이 아니었다. 남편은 “과분한 것들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기에 과분하지 않은 선택으로서 영혜와의 결혼을 결정했다. 그리고 그의 선택은 “말수가 적고” “무언가를 요구하지 않아” 자신을 피곤하게 하지 않는 아내 덕분에 현명하고 합리적인 것으로 비춰졌다. 그가 얼마나 자기만을 생각하고 자신의 삶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 알 수 있는 선택이기도 하다.
책을 읽으며 영혜에 대한 물음표가 늘어갔다. 그런데 그 물음표는 쉽사리 답을 내놓지 않았다. 화자인 ‘남편’이 독자인 나 만큼도 아내에 대해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바가지도 모를 만큼 유순한 아내가 유독 브래지어를 못견뎌하는 평범하지 않은 일에도 그저 과민함 정도로 치부할 뿐이었다.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는 아내의 마음 보다 그로 인해 혹여 주변인들에게 자신의 체면이 깎이지 않을까에만 신경썼을 뿐이다. 그에게 아내는 그저 기본적인 욕구를 해결해주고, 튀지 않는 삶을 위한 구색 맞추기였다. 아내는 그에게 철저히 타자였다.
성장기 아버지에게서 받은 육체적 학대와 결혼 후 남편에게서 받은 정신적 학대는 영혜를 온전한 정신으로 살아갈 수 없게 한다. 아무도 수긍하지 않는 꿈을 이유로 ‘채식주의자’가 된 영혜의 선택은 찢기고 피 흘리는 고통을 아는 이로서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손이 거친 아버지와 마음이 거친 남편으로 인해 그녀는 피웅덩이 속에 빠져 처절한 절규를 삼키며 살아가야 했다. 그런 영혜의 삶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녀를 안아주고 싶어졌다.
그래서 더더욱 영혜가 미친 것이라 믿고 싶지 않았다. 무언가 그녀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이유가 있을 뿐그녀는 이 힘든 삶을 잘 견디어 내리라 믿고 싶었다. 해피앤딩을 꿈꾸는 얄팍한 계산에서 오는 바람은 결국 무너지고 만다.
정작 사건의 중심에서 충격과 끝없는 의문을 던지는 영혜 자신은 작품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 발언권을 얻지 못한다. 마치 그녀의 삶이 그러했듯이……. 자신의 의지로 자신의 인생을 살아 보지 못한 자에게는 스스로를 변호할 기회 조차 주어질 수 없는 것인지, 삶이 잔인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이 작품은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하는 인물들로 가득하다. 평범함을 꿈꾸지만 결국 평범한 삶이 허락되지 않는 영혜 '남편'이 그러했고, 욕망하는 예술과 보여지는 예술의 이질감을 견디지 못하고 욕망에 잠식되는 '형부'가 그러했으며, 선량함, 안정감, 침착함으로 스스로를 옭마매는 언니 '박인혜'가 그러했으며, 찢기고 피흘리다 쓰러져가는 '영혜' 삶이 그러했다.
과분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 ‘남편’은 정과장, 정서방으로 표현 될 뿐 끝까지 이름 석자를 가지지 못한다. 정신적인 학대로 일관하다 결국 '영혜'를 버리는 무정함과 비인간적임에 이름 석자도 아까웠던일까? 사실 그는 거리를 나가면 어디에서든 쉽게 마주할 법한 평범한 인물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의 이기심이, 그의 비정함이 더 저릿하게 다가오는 것일지도…….
과분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과분한 것을 얻기 위한 노력조차 피로로 치부하는 하는 그의 안일한 삶을 의미한다. 평범함이라는 탈을 쓴 무미건조함과 무성의, 무정이다.
그는 채식주의를 선언한 아내의 마음 따위엔 관심이 없다. 자신의 식탁이 방해 받지 않았다면, 직장 상사들과의 부부동반 모임에서 아내의 채식이 튀는 그 무엇이 되지 않았다면 언제까지고 무감했을 그였다. 폄범함을 추구하는 그의 삶은, 평범함으로 포장된 무감과 무정에 잠식되어간다. 그의 나태함은 흔들리는 가정을 붙잡을 기회 조차 스스로 놓아버리게 한다. 그렇게 폄범함이라는 그의 꿈은 무너진다.
무감과 무정, 이기심을 평범함이라는 허울 속에 가두려 했던 ‘남편’은 그 이중성 속에 갇혀 온전한 삶을 살아보지 못한다.
두 번째 화자이자 예술가인 '형부'는 '오월의 신부'라 불리울 만큼 의식있고 강직한 성직자처럼 단순하고 무미한 예술을 추구하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몽고반점’이라는 단순한 단어 하나에서 비롯된 끌림으로 욕망에 빠진다.
강한 생명력으로 꿈틀대는 예술을 소망하였으나 이룰 수 없는 소망이었다. 하지만 마음에서 놓아지지 않은 소망이기도 했다. 결국 그 소망은 강한 욕망으로 변질되어 간다. 누구보다 뜨거운 욕망을 품었음에도, 누구보다 순수하고 냉철한 육신을 덧입고 살아간 그 역시 삶을 살지 못한다.
도덕과 관념을 벗어 버리는 순간 그는 욕망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며, 그것이 살아있음을 웅변한다 착각한다. 이성의 담에 작은 균열이 생기자 억압된 욕망은 일순간 문을 부시고 담을 무너뜨리며 그의 삶에 휘몰아쳤다. 살아있음을, 생명의 그 강한 꿈틀거림을 쥐었다 생각하는 순간 사회로부터, 가족으로부터 버림받는다.
유일하게 영혜를 이해하려 손 내미는 언니 김인혜 역시 책임감에 눌려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한다. “그녀는 살아본 적이 없었다. 기억할 수 있는 오래전의 어린시절부터, 다만 견뎌왔을 뿐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선량한 인간임을 믿었으며, 그 믿음대로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았다. 성실했고, 나름대로 성공했으며, 언제까지나 그럴 것이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후락한 가건물과 웃자란 풀들 앞에서 그녀는 단 한번도 살아본 적 없는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본문(p.197) 중” 인혜 역시 살아본적이 없다. 매순간 철저히 견디어왔을 뿐이다. “시간은 가혹할 만큼 공정한 물결이어서, 인내로만 단단히 뭉쳐진 그녀의 삶도 함께 떠밀고 하류로 나아갔다. - 본문(p.169) 중”
열심히 견디어 온 댓가는 처참했다. 처제를 욕망했고 예술을 욕망한 남편이 그 욕망에 잠식되어 버리면서 인혜 역시 함께 하류로 쓸려나가야 했다. “막을 수 없었을까. 두고두고 그녀는 의문했다. 그날 아버지의 손을 ...(중략)... 영혜의 칼을 ...(중략)... 남편이 피흘리는 영혜를 업고 병원까지 달려간 것을 ...(중략)... 영혜를 제부가 냉정히 버린 것을 ...(중략)... 말릴 수 없었을까. - 본문(p.166) 중” 어찌보면 모든 사건 속에서 가장 큰 피해자는 인혜처럼 보이기도 한다. 인내하였고 책임을 다했으며 성실하였다. 그런 그녀의 삶이 무너진 것은 그녀의 과오나 욕망 때문이 아니었다. 그런데 누구보다 철저히 무너진 것은 인혜였다. 무고한 피해자인가?
하지만, 그녀 스스로가 던진 질문에게서 그녀의 무고함이 흔들린다. 조금 더 강하게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면, 자해하는 영혜를 그녀가 보듬었다면, 달라졌을 삶이었다. 그녀는 철저히 견디었을 뿐 삶을 살지 못하였고, 그 대가로 추락했다.
식물이고 싶은, 그러기 위해 철저히 식물이고자 하는, 그 욕망으로 죽음을 향해 달음질 치는 영혜의 마음이 알아지는 인혜 모습에서 희망을 보았다면 지나친 것일까? 철저히 서로에게 타자였으며 삶을 알지 못했던 그네들 속에서 동생의 마음을 향해 시선을 돌리고 그 끈질기 눈길을 거두지 않는 모습에서 견디는 삶에서 벗어나는 그녀의 미래를 꿈꾸어본다.
맨부커 인터내셔너상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세계적인 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이라는 형용사에 현혹되었다고 해야 할지, 먼저 읽은 주변인들의 ‘충격적’이라는 표현이 던져주는 강렬한 이끌림에 유혹되었다고 해야 할지 알 수 없다. 어떤 이유로든 ‘한강’이라는 작가가 궁금했고, <채식주의자>라는 이 작품에 대한 끌림을 뿌리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만난 소설은 암울했고 답답했으며 처참했다. 그 잔인한 삶의 파편들을 견디는 마음으로 책장을 넘겼다. 피흘림과 찢김이 생존이라는 명목으로 자행되는 현실에서 나는 얼마나 스스로의 잔인함을 감추고 살아가는 것일까? 나는 내 삶을 살고 있을까? 타인을 짓밟는 삶이 아닌 함께 걸어가는 삶, 욕망에 잠식되는 삶이 아닌 욕망을 지배하는 삶을 소망한다. 견디는 삶과 이별을 소망하며 책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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