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3 딸의 논술 시험 마지막 날, 그 동안 애쓴 아이에게 휴식과 위로를 주기 위해 이미 한 달전에 예매한 뮤지컬 <빨래>를 보았다. 몇 년 동안 장기 공연 작품이라는 것과 호평이 이어진다는 것 말고는 어떤 줄거리인지 사전 정보가 전혀 없었다. 더 흥미롭게 보고 싶은 마음에 일부러 홈페이지 속 정보를 외면한 탓이다. 아이들과 오랜만에 보는 공연이라 함께 대학로 거리를 걷는 길 자체가 즐거움이고 행복이었다. 혜화역 1번 출구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극장에 도착해 사진 촬영도 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공연을 기다렸다.
소위 티켓 파워로 일컬어지는 유명 연예인이 단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 공연임에도 불구하고 객석을 가득 메운 관람객에게서 작품에 대한 신뢰가 느껴졌다. 적절한 위트로 공연 에티켓을 설명하는 배우의 익살이 끝나고 바로 공연이 시작되었다.
뮤지컬 <빨래>는 달동네 쪽방 생활을 하는 우리 사회 작고 힘없는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 본다. 몽골에서 일 자리를 찾아 한국에 왔지만 불법체류자가 된 ‘솔롱고’와 서점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나영’, 그리고 그들과 함께 달동네에서 살아가는 마을 사람들의 일상이 때로는 익살스런 웃음으로, 때로는 잔잔한 눈물로 다가왔다.
우리 사회 약자를 만나는 일은 마음이 힘든 일이다. 그들의 모습에서 나를 발견하기도 하고, 무기력한 스스로를 인정하기도 하고, 불합리한 사회와 권력에 대해 분노하기도 하며 아파해야 하기 때문이다. 너무나 현실적인 작품이라 보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회사를 위한 조언을 하고도 오히려 업무 태만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쫓겨나는 선배언니를 변호하다 창고로 발령을 받은 나영이 술에 취해 들어오던 밤,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주던 솔롱고는 마을 아저씨들의 부당한 언사와 폭력 앞에 놓인다. 아무런 항거도 하지 않는 그를 질타하는 나영에게 경찰서에 갈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말하는 솔롱고의 모습에서 부끄러움을 느꼈다. 우리 사회의 부당함은 어른들의 책임이기에 이런 사회가 부끄러웠고, 무기력한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그날 그 밤에 거리에서 주먹을 날리던 그들은 우리 사회 어딘가에 있을 법한 사람들이다. 자신도 몇 푼 안 되는 돈으로 전전긍긍 살아가면서 자기 보다 약자에게 철저히 군림하려드는 마을 아저씨이자 솔롱고의 월세방 주인 남자를 보면서 비열하지만 또 너무나 평범한 사람이라는 생각에 더 분노가 일었다. 자신이 갑이 되는 순간 철저히 을을 찢밟는 사회, 참 비겁하고 비열한 사람들이 우리 사회 곳곳을 채워가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기에...
병석에 누운 딸의 기저귀를 빠는 주인 할머니, 사랑에 이리치이고 저리치여 이제는 사람에 의존한 삶이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살아가겠노라 말하는 희정엄마. 모두 안아주고 싶고 토닥여주고 싶은 우리의 이웃이다.
권선징악은 없다. 그져 빨래를 하며 더러운 오물을 털어내듯 힘겨운 삶, 괴로움, 눈물 빨아내며 새롭게 힘을 내보자고... 힘든 거 안다고, 우리 모두 함께 잘 견디어 보자고... 그래서 더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그래서 더 위로받게 되는 작품이다.
"참 예뻐요 내 맘 가져간 사람. 참 예뻐요 내 맘 가져간 사람. 가을밤 잠 못 드는 사랑 준 사람. 짧게 웃고 길게 우는 사랑 준 사람..."
남녀주인공의 테마음악 같은 이 노래는 중독성이 있다.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게 되는...
그들의 사랑이 해피앤딩이라며 마냥 박수칠 수 없다. 이미 너무 세상을 많이 알아버린 탓이다. 그들의 사랑을 기쁜 마음으로 지켜볼 수 없는 현실에 먹먹함으로 더 뜨거운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부디 우리 사회가 순수함이, 정이 강한 힘이 되는 세상이 되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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